화요일 오후 12시 40분, 정독도서관 본관 앞 벤치에서 — 한지후의 일기 10: 펼쳐둔 책 다섯 권과 4월 말 햇살의 각도

점심을 김밥 한 줄로 빨리 끝내고 화동길의 정독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본관 정면 계단 앞에는 벤치가 셋 놓여 있고, 4월 말 12시 40분의 햇살은 아직 얼굴 정면이 아니라 약간 비스듬하게 어깨 쪽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25분 동안 본 것을 순서대로 적는다.

본관 정면 — 적벽돌과 1976이라는 현판

정독도서관 본관은 옛 경기고등학교 본관이 있던 자리다. 외벽은 적벽돌인데, 점심 햇빛이 비스듬하게 떨어지니 평소엔 안 보이던 줄눈이 깊이 약 1.5cm씩 그림자를 만든다. 가로로 한 줄에 28장쯤, 길게 쌓인 모양이다. 정면 아치 위에는 화강암 키스톤이 한 개 박혀 있고, 그 옆 화단 쪽 벽에 1976년에 도서관으로 바뀌었다는 작은 현판이 붙어 있다. 그 위로 등나무 줄기 하나가 길이 약 2.4m로 늘어져 있는데, 4월 말이라 작은 보라 꽃이 두 송이쯤 피어 있다. 손이 닿는 높이는 아니다.

벤치 셋, 사람 다섯 — 자세의 각도

본관 정면을 바라보는 벤치는 셋이다. 12시 40분 기준 사람이 다섯 앉아 있었다. 가장 왼쪽 벤치에는 회색 후드티에 검은 백팩을 무릎에 올린 30대 초반쯤의 남자 한 명. 등을 거의 90도로 똑바로 세우고 두꺼운 양장본을 읽는다. 가운데 벤치에는 두 사람. 한쪽은 흰 셔츠에 회색 슬랙스를 입은 회사원처럼 보이는 30대 남자, 다른 한쪽은 베이지 카디건을 입은 20대 후반쯤의 여자다. 둘은 약 60cm 떨어져 앉아 있고 둘 다 책이 아니라 휴대폰을 보고 있다. 가장 오른쪽 벤치에는 베이지 트렌치코트를 무릎 위에 덮고 등받이에 약 30도쯤 기댄 50대 후반쯤의 남자가 눈을 감고 있다. 자는 건지 햇살을 받고만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펼쳐둔 책 다섯 권 — 표지보다 페이지가 먼저 보였다

가운데 벤치 옆 화단 턱에 펼쳐둔 채 엎어둔 책이 한 권 있다. 페이지가 약 138쪽 부근에서 멈춰 있다. 글자 크기로 봐선 소설 같다. 왼쪽 벤치 남자 무릎 위 양장본 등에 영어 제목이 박혀 있는데, 거리가 멀어 정확히 못 읽었다. 가운데 벤치 위에는 본관 안쪽 열람실에서 들고 나온 듯한 책 세 권이 표지를 위로 한 채 쌓여 있다. 합치면 다섯 권이다. 나는 표지를 다 확인하지 않고, 책이 멈춘 페이지의 위치만 기록했다. 누군가 화장실에 가거나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의, 25분 동안 멈춘 책장 다섯이다.

4월 말 햇살의 각도 — 그림자 길이로 시간을 짐작했다

벤치 가장 오른쪽 끝에 내 운동화 코를 놓고 그림자 길이를 재 봤다. 한낮에 가까운데도 그림자는 발끝에서 약 22cm 옆으로 떨어진다. 겨울에 비하면 훨씬 짧지만, 한여름의 거의 0에 가까운 그림자는 아니다. 4월 말의 햇살은 이런 각도를 가진다. 본관 외벽에 닿는 햇빛은 정면이 아니라 약 30도 위쪽, 동남쪽에서 비스듬하게 떨어진다. 그래서 적벽돌이 평평하게 보이지 않고, 줄눈마다 작은 그림자가 생긴다. 같은 벽이 아침과 점심에 다르게 보이는 이유다. 나는 12시 40분의 정독도서관 본관을 봤다.

참새 한 마리, 그리고 멀리서 들린 종소리

벤치 사이로 참새 한 마리가 두 번 걸어 지나갔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약 0.5m 거리까지 다가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본관 안쪽, 종로 방향에서 멀리 종소리 비슷한 게 한 번 들렸다. 정확히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고 시간은 12시 50분쯤이었다. 정자세로 책을 읽던 남자가 그제야 손목시계를 봤다. 가운데 벤치의 두 사람은 그대로였다. 같은 자리에서도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1시 5분 — 일어났다, 그림자만 살짝 짧아졌다

1시 5분에 벤치에서 일어났다. 책 다섯 권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정자세 남자는 책을 덮고 떠났고, 잠든 듯하던 트렌치코트 남자는 아직 그대로였다. 가운데 두 사람도 그대로였다. 25분 동안 본관 외벽도, 등나무 줄기도, 키스톤도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발끝의 그림자만 약 3cm쯤 짧아져 있었다. 4월 말 화요일 점심의 정독도서관은 그런 자리였다.

— 결론. 평일 점심의 정독도서관 본관 벤치는 누군가의 일정 가운데 놓인 25분을 위한 자리다. 책을 읽는 사람도, 책을 그냥 펼쳐둔 사람도, 햇살만 받는 사람도 같은 그림자 안에 잠시 머물렀다. 4월 말의 햇살 각도는 짧은 멈춤을 허락한다. 한지후의 일기 10편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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