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동네의 풍경 — 재개발 앞에서 20대가 느끼는 노스탤지어에 대하여
재개발은 누군가에겐 자산이고 누군가에겐 추억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동네가 사라지는 모습 앞에서 20대인 내가 왜 자꾸 멈추는지, 그 이유를 정리한 짧은 도시 에세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동네가 사라질 때
이상한 일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동네가 사라진다는 소식에 자꾸 마음이 뻐근해진다. 나는 흑석동도, 노량진도, 한남3구역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 동네 일대가 재개발로 묶였다는 기사를 보면 그 주 토요일 산책 코스를 그쪽으로 잡는다. 9호선과 6호선 환승 구간을 굳이 한 번 더 갈아타면서까지.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의 정체가 뭔지, 한참을 들여다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노스탤지어의 다른 형태였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살아본 시간만 그리워하지 않는다. 살아보지 않은 시간, 다음 세대가 살게 될 시간, 그 사이에 끼어 있는 풍경마저 함께 그리워한다. 도시는 한 사람의 추억이 아니라 여러 세대의 기억이 겹쳐 있는 거대한 앨범이다. 그 앨범에서 한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 나간다고 생각하면, 사는 곳과 상관없이 어딘가 빈자리가 생긴다.
재개발이라는 단어의 두 얼굴
재개발이라는 단어 앞에선 늘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든다. 하나는 합리적 동의다. 노후한 인프라, 안전 문제, 부족한 주차, 비효율적 동선. 도시는 분명히 새로 짜여야 할 부분이 많다. 데이터를 봐도, 주거 만족도와 안전 지표는 재개발 이후 크게 개선되는 경우가 많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비합리적이지만 진짜인 감정이다. 어떤 동네는 효율의 척도로 잴 수 없는 결을 가지고 있다. 좁은 골목, 손때 묻은 간판, 한 가게에서 30년을 버틴 사장님, 모르는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는 작은 평상. 이런 것들은 재개발의 도면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새 단지의 광장은 멀쩡히 들어서지만, 그 동네 특유의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해도 같은 결은 아니다.
AI에게 물어본 "사라진 동네들"
문득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봤다. "최근 10년 동안 서울에서 재개발로 풍경이 가장 크게 바뀐 동네 다섯 곳을 정리해줘." 답에 적힌 동네 이름들을 하나씩 검색해 옛 사진과 지금 사진을 나란히 봤다. 어떤 곳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어떤 곳은 새 건물 사이에 한 두 채의 옛집이 외롭게 끼어 있었다. 어떤 곳은 단지 안 카페 이름으로만 옛 동네 이름이 남아 있었다.
기록의 방식은 시대마다 달라진다. 옛날엔 동네가 사라지면 그 풍경도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사진과 영상, 누군가의 블로그 글, AI가 학습한 데이터 안에 그 풍경이 흐릿하게나마 남는다. 그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된다. 우리가 잃는 것이 백 퍼센트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 적어도 누군가의 한 줄로는 살아남는다는 것.
20대인 내가 노스탤지어를 다루는 방식
노스탤지어는 자칫 보수의 감정으로 빠지기 쉽다. "옛날이 좋았다"는 한 줄로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 나는 그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시는 멈추면 죽는다. 변화는 도시의 생리다. 다만, 변하는 동안 무엇을 데려가고 무엇을 놓아둘지에 대한 선택은 가능하다. 그 선택을 잘하기 위해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똑바로 봐야 한다.
20대인 내가 노스탤지어를 다루는 방식은 단순하다.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남기고, 한 번 더 걸어본다. 그게 전부다. 거창한 보존 운동도 아니고, 정책 제안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시선이 한 동네의 마지막 표정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도시는 조금 더 친절해진다고 믿는다.
마무리 — 다음 산책의 좌표
다음 주말엔 한강 남쪽의 한 동네로 가볼 생각이다. 곧 가림막이 쳐질 거란 소식을 들었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동네지만, 그래서 더 가야 한다. 사라지기 전에 보는 일은, 결국 한 시대를 한 번이라도 똑바로 본다는 일이다.
도시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한 사람이 한 번 더 멈춰 서서 봐 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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