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부암동, 우규승이 설계한 환기미술관 언덕 — 30년 된 콘크리트의 나이를 읽다
일요일 오후 두 시, 나는 부암동 북쪽 언덕을 올라 환기미술관에 도착했다. 이 글은 우규승 건축가가 1992년에 설계한 이 작은 미술관에서 김환기의 그림보다 먼저 내 시선을 끌었던 건물 외피와 빛에 대한 짧은 메모다.
부암동 언덕을 오르는 20분, 발바닥에 걸리는 경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0212번 마을버스로 갈아타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 내렸다. 거기서부터 환기미술관까지는 걸어서 20분쯤. 지도 앱은 14분이라고 찍어주지만, 경사 때문에 내 다리는 항상 6분쯤 더 걸린다. 창의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왼쪽으로 작은 갤러리와 게스트하우스가 하나씩 보였다가 사라진다. 오후 2시의 햇빛이 벽돌 담장 위를 대각선으로 스쳐 지나갔다. 봄이라고 하기에는 바람이 아직 찼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기온을 확인하니 섭씨 13도, 풍속 초속 3미터였다.
환기미술관의 외피 — 콘크리트가 왜 이렇게 '흐릿'해 보이는가
건물 앞에 서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콘크리트의 질감이었다. 일반 노출 콘크리트처럼 매끈하지 않고, 표면이 잔잔하게 얽혀 있다. 30년 세월이 만든 이끼와 회색 먼지, 그리고 부암동 특유의 석회 섞인 빗물이 남긴 얼룩이 합쳐져 전체가 살짝 '흐릿'한 인상을 준다. 우규승 건축가가 처음 설계했을 때의 콘크리트는 지금보다 훨씬 차가운 회색이었을 거다. 나는 장갑을 벗고 벽에 손을 대 봤다. 손끝이 거칠고 서늘했다. 1992년의 차가움이 2026년의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1992년 우규승, 2026년 나 — 콘크리트의 '나이'를 읽다
환기미술관은 1992년 가을에 개관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우규승 건축가는 당시 미국 보스턴에 사무소를 둔 한국계 건축가였고,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 여사가 오랜 고민 끝에 그를 선택했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콘크리트는 '늙어' 왔다. 그런데 이 '늙음'이 건물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김환기의 그림 — 푸른 점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그 그림들 — 과 이상하게 어울린다. 점묘와 얼룩은 다르지만, 시간이 일정한 간격으로 쌓였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한 방식으로 늙는다.
본관 로비 천장 약 7미터, 그리고 북측 천창의 빛
안에 들어가면 로비 천장이 대략 7미터쯤은 되어 보인다. 정확한 수치는 도록에서 확인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네 번 쌓여도 남을 높이다. 천장에는 북측 방향으로 난 천창이 있다. 북측 천창은 미술관 설계에서 흔한 선택이지만, 여기서는 빛이 아주 희미하게 '떨어진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직광이 아니라, 벽을 한 번 긁고 바닥으로 내려앉는 빛. 오후 2시 반, 나는 로비 벤치에 앉아 그 빛이 바닥 타일 위에서 1분에 1센티미터쯤씩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김환기의 그림과 건물이 서로에게 양보하는 방식
미술관의 진짜 놀라운 점은 건물과 그림이 싸우지 않는다는 거다. 보통 현대 미술관은 건물이 그림보다 먼저 '내가 건축이다'라고 외친다. 여기는 반대다. 벽은 뒤로 물러나고, 그림 앞에 선 관람자가 그림에 제대로 빠져들 수 있게 빛을 양보한다. 그런데 그 '양보'가 수동적이지 않다. 벽의 질감이, 천장의 높이가, 바닥의 재질이 모두 '지금 이 그림을 이렇게 보세요'라고 조용히 지시한다. 우규승 건축가가 김향안 여사와 수많은 대화를 거쳤다는 이야기가, 건물 안을 돌면 몸으로 이해된다.
내려오는 길, 창의문 정류장에서의 짧은 메모
4시쯤 미술관을 나왔다. 언덕을 내려와 창의문 정류장에서 다시 0212번 버스를 탔다. 나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어 오늘 본 것 세 가지를 적었다. 첫째, 콘크리트는 늙을 수 있고 그 늙음이 자산이 된다. 둘째, 빛은 직접 쏘지 않고도 전시를 완성한다. 셋째, 건축과 그림이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20대 남자도 미술관에 두 시간 반쯤 앉아 있을 수 있다. 버스가 출발했고, 창 밖으로 언덕 위 미술관의 지붕이 한 번 더 보였다가 사라졌다.
결론 — 30년을 잘 늙은 건물에게 배우는 것
이번 답사에서 내가 얻은 건 '좋은 건물은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다. 재개발과 철거가 속도를 내는 2026년 서울에서, 30년 넘은 건물이 여전히 제 몫을 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귀하다. 다음 주말에는 환기미술관에서 내려오는 수향산방 쪽 계단길을 조금 더 느리게 걸어볼 생각이다. 그곳의 담벼락이 어떻게 늙고 있는지, 사진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확인하고 싶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