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후의 일기 18: 5월 셋째 화요일 오후 2시 16분,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 — 인쇄골목 세 블록과 등사 잉크 냄새

나는 5월 셋째 화요일 오후,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로 나왔다. 인쇄골목 세 블록을 천천히 걸었고, 그 27분 동안 등사 잉크 냄새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그 골목의 작업등 색과 셔터 위 숫자를 적어둔다.

출구를 나서며 — 오후 2시 16분, 22도, 흐림

지하철 11번 출구를 올라오자마자 왼쪽 어깨가 먼저 알아챘다. 종이 묶음을 트럭에 옮기는 사람 셋이 보였고, 그 옆 가게 셔터에서는 모터 소리가 났다. 핸드폰 시계는 14:16. 흐림. 바람은 가볍게 북쪽으로 불었다. 길 건너 약국 앞 디지털 온도계는 섭씨 22도를 가리켰다. 신호등이 한 번 바뀌는 동안 종이 더미를 실은 짐자전거가 두 대 지나갔다. 골목 입구 보도블록은 한쪽이 닳아 살짝 패였고, 그 위로 잉크 자국 같은 검은 얼룩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있었다.

첫 블록: 5층 건물 다섯 채와 'OO인쇄' 간판들

첫 블록은 5층짜리 건물 다섯 채가 어깨를 맞대고 이어졌다. 1층은 거의 다 인쇄소였다. 안쪽 4~5미터 깊이로 옵셋 인쇄기가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사람보다 큰 종이 더미가 천장 가까이 쌓여 있었다. 간판은 '경동인쇄', '삼우인쇄', '한일인쇄', '대동기획' 같은 두 글자에 '인쇄'가 붙은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글자 색은 70퍼센트쯤이 빨강과 파랑이고, 남은 두어 곳만 검정 위에 금박을 얹었다. 빨강은 페인트가 오래되어 분홍에 가까웠고, 파랑은 일관되게 진했다. 어떤 간판은 1990년대 후반에 만든 듯한 아크릴 컷팅 글자였고, 어떤 간판은 손글씨 그대로였다.

두 번째 블록: 작업등 노란색의 정체

두 번째 블록으로 들어서니 가게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일관되게 노란색이었다. 처음엔 백열등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보니 LED인데도 색온도가 2700K쯤으로 낮게 맞춰져 있었다. 한 가게 앞에 멈춰 셔터 안쪽을 봤더니, 작업대 위에는 인쇄 견본을 검수하는 데 쓰는 5500K짜리 형광등이 따로 켜져 있었다. 노란 빛은 분위기, 흰 빛은 일. 두 가지가 한 가게 안에 같이 있었다. 사장님께 살짝 물어봤더니, 색 검수는 흰 빛 아래에서 해야 종이 색이 정확히 보인다고 했다. 노란 빛은 손님이 들어왔을 때 가게가 따뜻해 보이라고 켜둔 것이라 했다.

세 번째 블록: 셔터 위에 적힌 번호들

세 번째 블록은 골목이 좁아져 트럭이 한 대씩만 지나갔다. 셔터 위에는 흰색 페인트로 '12-3', '12-5', '12-7' 같은 번호가 적혀 있었다. 처음엔 지번인 줄 알았는데, 한 가게 사장님께 물어보니 인쇄 공정상 종이 배달 트럭이 가게를 찾기 쉽게 1980년대부터 자체적으로 매긴 번호라 했다. 행정 주소가 도로명으로 한 번, 그 사이에 또 한 번 바뀌었는데도 이 번호는 그대로라고 했다. 일종의 골목 내부 좌표계였다. 트럭 기사들끼리 '12-7로 보내'라고 말하면 정확히 어디인지 안다고 했다.

골목 끝 — 모퉁이 분식집과 1500원짜리 라면

세 블록 끝에 작은 분식집이 있었다. 메뉴판은 손글씨였고, 라면 1500원, 김밥 2000원, 라볶이 4000원이라 적혀 있었다. 가게 안에는 인쇄소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 두 명이 늦은 점심을 들고 있었다. 라면 그릇 위로 김이 올라오는데, 그 김 사이로 또 한 번 등사 잉크 냄새가 지나갔다. 잉크 냄새는 이 골목 전체에 배어 있는 듯했다. 한 분이 신문을 펴 들고 다른 한 분과 인쇄 단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년 사이 종이값이 한 번 더 올랐다는 얘기였다.

메모

인쇄골목 세 블록을 걷는 데 27분이 걸렸다. 가게 수는 대략 30곳. 작업등 노란 빛은 분위기, 작업대 흰 빛은 검수용이었다. 셔터 위 번호는 행정 주소와 별개의 골목 내부 좌표계였다. 사라지기 전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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