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쿠샤 1923 — 5월 셋째 일요일 오후, 행촌동 은행나무 옆 빨간 벽돌집의 단면
5월 셋째 일요일 오후 두 시 반, 사직터널 입구에서 송월길로 꺾어 행촌동 1-89번지에 닿았다. 1923년에 지은 빨간 벽돌집 딜쿠샤(DILKUSHA)는 수령 466년 은행나무 그늘 아래 여전히 서 있다. 정초석 글자, 영국식 쌓기 줄눈, 박공지붕과 다락 창문, 1.5층 베란다와 은행나무 둘레까지 한 시간을 머물며 본 단면을 적는다.
정초석, "DILKUSHA 1923 PSALM CXXVII.I"
정면 출입구 왼쪽 벽, 지면에서 약 1.2m 높이에 가로 28cm 세로 14cm짜리 화강석 정초석이 박혀 있다. 글자 깊이는 2~3mm. 윗줄에 DILKUSHA, 그 아래에 1923, 가장 아래에 PSALM CXXVII.I이 라틴 숫자로 새겨져 있다. 영문 활자체는 세리프, 한 글자 높이는 4.5cm 남짓이다. 시편 127편 1절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미국인 알버트 W. 테일러는 자기 집을 그 한 줄 위에 올렸다. 정초석 아래 작은 화강석 받침까지 합치면 정초석 전체 높이는 24cm 남짓하다. 일요일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글자에 걸려, 깊이 2mm짜리 그늘이 활자 안쪽에 한 줄로 떨어졌다.
영국식 쌓기와 흰 줄눈 8mm
외벽 빨간 벽돌은 가로 약 24cm, 세로 약 5.5cm. 한 단은 길이면(stretcher)만, 그 다음 단은 마구리(header)만 — 영국식 쌓기(English bond)다. 줄눈은 흰 회반죽으로 두께 약 8mm.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줄눈 빠짐은 거의 보이지 않고, 다만 동측 벽 1층 창문 아래쯤은 회반죽 새로 채워 넣은 자국이 있다. 색이 살짝 더 희다. 벽돌 한 장씩 들여다보면 옅은 검댕이 줄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손가락으로 스치면 잿가루가 살짝 묻을 듯한 표면이다. 1923년 이후의 매연과 비와 손이 한 장 한 장 위에 얹혀 있다.
박공지붕 두 면과 다락 창문 셋
지붕은 동서로 마주 보는 박공(gable) 두 면. 회색 슬레이트 톤의 기와, 한 장 가로 약 25cm. 정면 박공의 끝선 각도는 대략 45도쯤으로 가파르지 않다. 박공 안쪽 다락층에는 가운데 큰 창 하나, 좌우 작은 창 두 개가 일렬로 박혀 있다. 가운데 창은 위가 반원형 아치, 옆 두 창은 사각형. 창틀은 흰색 페인트가 두텁게 칠해져 있고, 군데군데 페인트가 일어나 안쪽 회색 나무 결이 보인다. 다락 창 너머로 비스듬한 트러스 구조의 천장이 살짝 비친다. 처마 아래엔 빗물 받이 양철 받침이 동선처럼 가로로 달려 있고, 모서리에서 한 번 90도로 꺾여 동측 벽을 따라 내려간다.
1.5층 베란다와 정면 계단 일곱
정면 1층 위로 반층 들어간 자리에 벽돌 베란다가 있다. 가로 폭 약 5m, 깊이 약 1.8m. 1층에서 베란다로 오르는 정면 계단은 일곱 단, 한 단 높이 약 17cm. 베란다 난간은 흰 페인트를 칠한 사각 기둥 여덟 개로 단순하게 끝난다. 베란다 안쪽 문 위에는 반원형 채광창(fanlight)이 하나 박혀 있고, 그 안의 빗살 격자는 여섯 칸이다. 베란다 바닥은 사방 30cm짜리 빨간 타일을 깐 듯한데, 가장자리는 일부 깨져 시멘트 바닥이 드러난다. 1923년 누군가의 손이 깐 자리에 2026년 내 발이 잠시 멈춘다.
은행나무 — 수령 466년의 둘레
딜쿠샤 마당 동쪽엔 수령 466년이 넘는다는 행촌동 은행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다. 안내판에 1989년 보호수 지정. 둘레 약 7.8m, 키 24m. 한 사람이 두 팔로 안아도 절반 정도가 채워질 뿐이다. 가지 끝은 딜쿠샤 지붕 위로 8m쯤 더 올라가 있다. 5월 셋째 일요일 오후 두 시 반, 은행잎은 손바닥 크기로 막 펴졌고 색은 옅은 연두. 햇빛이 잎 사이로 새서 빨간 벽돌 위에 동전 크기 그림자 셋, 다섯, 일곱이 떨어졌다. 권율 장군의 옛 집터였다는 안내문이 나무 옆에 붙어 있다. 1923년의 빨간 집과 1560년대의 나무가 같은 마당에 서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단단하게 느껴졌다.
사라지지 않은 집의 단단함
사라질지도 모르는 골목과 셔터를 기록하러 다닌다고 늘 적어 왔는데, 오늘은 사라지지 않은 집의 단단함을 보았다. 1923년 빨간 벽돌, 1560년대 은행나무, 그리고 그 둘레를 도는 2026년의 발걸음. 정초석 글자 한 줄과 줄눈 8mm와 박공의 각도 45도. 다음에 올 때는 가을 노란 잎을 본 채로 정초석 글자를 다시 한번 따라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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