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인동 박노수가옥 1937 — 한옥과 양옥이 한 지붕 아래 만난 자리

옥인1길 34, 박노수미술관. 나는 5월 둘째 목요일 오전 10시 47분에 정문 앞 화강암 계단 다섯 칸을 올라섰다. 1937년에 지어졌다는 이 가옥은 1층은 양식, 2층은 한식이라는, 한 지붕 아래 두 문법이 공존하는 집이다. 사라지는 것을 기록한다는 원칙으로, 나는 이 집의 벽돌과 서까래와 벽난로 자리를 차례로 따라 걸었다.

옥인1길 34 — 골목이 끝나는 자리의 붉은 벽돌

나는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따라 8분 걸었다. 옥인동주민센터를 끼고 좌회전하면 옥인1길이 시작된다. 길은 점점 좁아져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폭이 된다. 길 끝에 가까워질수록 양옆으로 1970년대 다세대주택의 회벽이 늘어선다. 그 회벽들이 일제히 끊기는 자리에 박노수가옥의 담장이 나타난다. 담은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올린 형식이다. 높이는 어림잡아 1.8m쯤. 모서리마다 시멘트로 마감한 갓돌이 얹혀 있다. 담장 안쪽에서 큰 키의 소나무 두 그루와 회양목이 보이고, 그 너머로 2층짜리 본채의 박공지붕이 비스듬히 솟아 있다.

현관과 벽난로 — 양식의 입구

입장료 3,000원을 내고 1층 응접실로 들어섰다. 출입문은 두 짝짜리 목재 여닫이로, 위쪽에 격자 유리창이 끼워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벽난로가 있다. 박노수 화백이 1973년에 이 집을 매입한 뒤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벽난로 외부는 인조석으로 마감했고, 입구 폭은 약 75cm, 위쪽 선반 높이는 130cm 정도였다. 양옆으로는 같은 인조석으로 두께 약 18cm짜리 기둥이 세워졌다. 천장은 우물반자 형식인데, 칸 하나가 사방 80cm쯤 되는 격자였다. 1937년 양식 응접실의 표준 도면을 옮겨놓은 듯한 구조라, 나는 잠시 이 집의 초기 시공이 일제 강점기 옥인동 일대의 부유층 가옥 의뢰로 이루어졌다는 안내문의 한 줄을 떠올렸다. 응접실 한쪽 벽에는 박 화백이 1979년에 그린 청록산수가 걸려 있어, 양식 공간과 동양화의 색이 부딪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 양식에서 한식으로

응접실 안쪽 복도로 들어가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 폭은 약 90cm. 디딤판은 짙은 갈색 목재이고, 챌판은 한 칸 높이 18cm로 가팔랐다. 손스침은 둥근 목재 난간으로, 광택이 닳아 손때 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 나는 이 집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건축 문법을 바꾼다는 사실을 점점 분명하게 느꼈다. 계단참 창문은 위아래로 여는 더블헝 윈도. 그러나 2층 복도에 도착하는 순간, 천장이 낮아지고 마감재가 회벽에서 한지로 바뀐다.

2층 온돌방 — 한식의 거처

2층의 세 방은 모두 한식 온돌이다. 가장 큰 방은 약 9㎡ 정도였고, 천장은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다. 서까래는 굵기 약 9cm짜리 둥근 소나무재로, 검게 그을린 흔적이 살짝 남아 있다. 박 화백은 이 방을 화실로 썼다고 한다. 벽장 안쪽에 옷장이 아니라 화선지 보관함이 짜여 있는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창은 띠살문 위에 미닫이 유리창을 덧댄 이중 구조. 미닫이를 열면 정원 쪽으로 인왕산 자락이 바라다보인다. 11시 5분의 햇빛이 띠살문 살 하나하나에 그림자 줄을 만들었다. 나는 그 줄을 세어보다가 9개에서 그만두었다.

정원의 석상 다섯 — 600평 마당이 보존한 것

본채를 나와 정원으로 내려섰다. 종로구청 자료에 따르면 대지 면적이 약 1,950㎡, 옛 단위로는 약 600평이다. 정원 한가운데 너른 잔디밭이 있고, 가장자리를 따라 석상이 다섯 개 흩어져 있었다. 동자석 둘, 문인석 둘, 그리고 호랑이를 닮은 석수가 하나. 박 화백이 살아생전 전국을 다니며 모았다는 그 석상들이다. 잔디 위에 앉아 본채를 바라보니, 1층의 벽돌과 2층의 회벽과 박공지붕의 기와가 한 화면에 들어왔다. 그 화면이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나는 적었다. 양식과 한식이라는 두 어법이 서로를 이기려 들지 않고, 위아래로 층을 나누어 살림을 차렸다.

결론 메모 — 절충이 보존하는 것

11시 22분에 정문을 나섰다. 옥인1길의 좁은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동안, 나는 박노수가옥이 그저 1937년의 건축물로 멈춰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양식 응접실과 한식 온돌방을 한 건물 안에 들이는 절충 양식은, 그 시대 부유층 가옥이 외래 문법과 토착 문법을 어떻게 협상했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자료다. 그리고 그 자료를 종로구가 시민에게 개방해 두었다는 사실이, 이 집의 가장 단단한 보존 방식이라는 점도 적어 둔다. 다음 산책은 같은 옥인동의 다른 한옥 골목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 한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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