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후의 일기 20: 5월 넷째 목요일 오전 7시 48분, 청파동 청파로47길 — 출근길 골목의 노포 여섯과 1991 우편함
5월 넷째 목요일 오전 7시 48분, 나는 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청파로47길로 들어섰다. 산자락에서 내려오는 공기는 아직 17도쯤이었고, 봄 끝과 초여름 사이의 그 어정쩡한 온도가 골목 안에서 한 번 더 식는 느낌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셔터를 올리는 소리, 그리고 1991년에 박아 넣은 듯한 청록색 우편함 — 오늘 일기 20번째 산책은 여기서 시작한다.
1. 청파로47길의 너비, 약 3.6m
청파로47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폭이다. 줄자를 들고 잰 건 아니지만, 양쪽 외벽 사이에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팔을 펴면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어림잡아 3.6m. 길은 산쪽으로 완만하게 휘어 올라가고, 바닥에는 1990년대 어디쯤의 화강석 보도블록이 깨진 채로 남아 있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노란 선은 이미 절반쯤 지워졌고, 그 위로 흰색 자전거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안장에 비닐 봉지가 묶여 있었다. 자물쇠는 풀려 있었다. 누가 잠시 두고 간 것이 아니라, 오래 거기 있는 자전거의 표정이었다.
2. 노포 여섯, 셔터의 두께
골목을 7분쯤 걸어 올라가면서 셔터를 막 올리는 가게 여섯을 세었다. 첫째, "동백세탁" — 간판 글씨가 1980년대 식자체. 둘째, "청파슈퍼" — 냉장고 두 칸, 콜라와 두유가 같은 줄에 섰다. 셋째, "용진철물" — 셔터에 페인트로 직접 쓴 전화번호, 국번이 7로 시작하는 옛 양식. 넷째, "성진이용원" — 회전등이 아직 돌지 않고 멈춰 있었다. 다섯째, "참기름집"이라고만 적힌 무명의 가게. 여섯째, 이름 없는 떡집 — 김이 한 줄기 막 올라오는 중이었다. 시간이 7시 53분이었다. 떡집의 김은 섭씨 80도쯤일 것이다.
3. 1991 우편함과 호수의 빈 칸
골목 중간에 회색 시멘트 외벽을 가진 4층 빌라가 있다. 입구에 박힌 우편함은 청록색 철제, 1층부터 4층까지 총 8칸. 칸마다 호수를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4칸은 글씨가 또렷하고, 3칸은 종이가 누렇게 떴고, 마지막 한 칸은 빈칸이었다. 이 빈칸이 오늘 가장 오래 본 풍경이다. 누가 떠난 자리는 보통 새로운 종이로 빨리 채워지지만, 채워지지 않은 채로 오래 남아 있는 칸은 그 자체로 어떤 신호다. 우편함 옆에는 검은색 펜으로 "전기 검침원 출입 가능, 아침 8시 이후"라고 적힌 메모지가 코팅도 없이 붙어 있었다. 손글씨는 60대쯤의 글씨였다.
4. 골목 끝, 산쪽의 작은 공터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면 약 4평쯤 되는 비포장 공터가 나온다. 한쪽에 평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신문지 한 장과 비어 있는 일회용 컵 두 개.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다. 평상 너머로 청파동의 지붕들이 한 번에 보이는데, 옥상마다 파란색 물탱크가 하나씩 올라가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꺼번에 지어졌다는 흔적이다. 멀리 남산 방향으로 N서울타워의 윗부분이 살짝 보였다. 그 사이에 새로 올라가고 있는 27층짜리 주상복합의 크레인도 같이 보였다. 같은 화면 안에 1991년과 2026년이 겹쳐 서 있었다.
5. 20대인 내가 이 골목을 다시 보는 방식
나는 강남의 신축 오피스텔에서 자랐다. 천장이 2.4m로 평평하고, 우편함이 디지털 도어록 옆 작은 격자 박스로 통합된 곳. 그래서 청파로47길 같은 골목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그저 "낡았다"고만 느꼈다. 그런데 일기 20번을 쓰는 동안 알게 된 건, 낡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방치된 낡음과, 계속 쓰이고 있는 낡음. 동백세탁의 셔터는 매일 아침 7시 50분에 올라간다. 청파슈퍼의 두유는 매일 새로 들어온다. 1991 우편함의 7칸은 지금도 받는 사람이 있다. 이 골목은 낡은 게 아니라, 단지 오래 쓰이고 있을 뿐이다.
6. 다음 산책 메모
청파동은 향후 5~10년 안에 정비 구역 논의가 한 번은 오갈 동네라고 한다. 검색 시점(2026년 5월) 기준, 청파제2구역은 재개발 추진위 단계의 흐름이 보이고, 청파제1구역은 좀 더 천천히 움직이는 분위기다.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 본 셔터 여섯과 우편함 한 칸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에는 너무 구체적인 풍경이었다. 다음 주에는 같은 골목을 비 오는 날 오후 5시에 한 번 더 걷고 싶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셔터가 내려가는 시간이 몇 시 몇 분인지, 그것까지 확인하고 일기 21에 적기로 한다.
— 다음 글에서는 일기가 아닌 도시읽기 시리즈로, 청파제1구역의 가구 수·접도 폭·노후도를 좀 더 차갑게 정리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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