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후의 일기 22 — 5월 넷째 일요일 저녁 7시 19분, 응봉산 팔각정에서 동호대교 너머 강남까지
일요일 저녁의 어중간한 한 시간을 응봉산에 버리기로 했다. 해발 95m짜리 동산이지만 팔각정 난간에 팔을 걸치면 한강철교부터 강남 아파트 능선까지가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일요일 저녁의 색을 적는다.
응봉역에서 산 입구까지, 800m의 오르막
중앙선 응봉역 1번 출구에서 산 입구까지는 도보로 약 800m. 응봉동 산1번지 표지석을 지나면 바로 가파른 데크 계단이 시작된다. 저녁 7시 19분, 해는 떨어졌고 하늘은 아직 식지 않았다. 기온은 섭씨 22도쯤. 반팔 셔츠 위에 걸친 얇은 후드 지퍼를 산 초입에서 내렸다. 계단 양옆의 개나리는 4월의 노랑을 모두 비우고 짙은 초록 잎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일요일 저녁의 응봉산 계단은 의외로 비어 있다. 마주친 사람은 가족 두 팀과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 한 명. 모두가 약속한 듯 말이 없다.
팔각정 난간에서 본, 5월 말 일요일의 강
해발 95m의 정상 팔각정에 도착한 시각은 7시 31분. 입구에서 정확히 12분 걸렸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정면을 보면 왼쪽부터 한강철교, 동호대교, 그 너머 옥수동 강변북로의 노란 헤드라이트 줄, 그리고 강 건너 압구정의 아파트 능선이 차례대로 펼쳐진다. 5월 마지막 일요일의 강물 색은 옅은 회청색에 가까웠다. 한낮에 24도까지 올랐던 기온이 천천히 식으면서, 강의 표면이 잠시 무광 페인트처럼 보이는 시간이 있다. 7시 39분에 동호대교를 지나는 3호선 전철이 강을 가르는 모습을 봤다. 6량짜리 흰색 차량 하나가 50초쯤 걸려 다리를 건넜다.
오늘의 옷차림 —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변화구
일요일 산책용으로 입은 옷은 단순했다. 흰색 면 반팔 티셔츠, 그 위에 얇은 무지 회색 후드 집업, 어두운 카키색 면 와이드 팬츠, 발은 흰색 캔버스 운동화. 평일 출퇴근 때는 절대로 입지 않는 후드 집업이지만, 5월 말 일요일 저녁 산을 오를 때 22도와 19도 사이의 변화구를 받아내기엔 이 두께가 가장 정확하다. 응봉산 정상에서 바람이 닿는 5분 동안 후드를 다시 올렸고, 내려오는 길 절반쯤에서는 다시 내렸다. 패션 블로그 글을 쓰는 입장에서 인정하기는 좀 그렇지만, 일요일 저녁의 옷은 사진보다 체온이 먼저다.
길에서 마주친 두 가지 풍경
내려오는 길에 두 장면을 기록했다. 하나는 응봉동 삼익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본 풍경. 1976년 준공된 5층짜리 저층 아파트 단지인데, 정문 옆 화단의 영산홍은 5월 첫째 주에 만개했다가 지금은 거의 다 졌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누군가가 빗자루로 한쪽에 모아 두었다. 두 번째 장면은 응봉동 행정복지센터 앞 횡단보도. 신호 대기 중이던 노부부 한 쌍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두 사람 다 회색 운동화에 같은 브랜드의 검은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같은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같은 옷을 산 사람들의 자세였다. 5월 24일 저녁 7시 53분의 일이다.
응봉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골목
집까지는 응봉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옥수동 방향으로 한 정거장을 더 걷기로 했다. 응봉산 남쪽 사면에서 동호대교 북단으로 내려가는 골목은 폭이 좁고 경사가 가팔라서, 1980년대에 지은 다세대 주택이 아직 절반 정도 남아 있다. 1989년 준공이라는 명패가 붙은 빌라 하나와, 옥상에 옛 양식의 청록색 물탱크가 올라가 있는 단독 주택 두 채를 지났다. 이런 건물들은 빠르면 2027년 안에, 늦어도 2029년 전후로는 도시정비형 재개발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도시읽기 노트의 일기 버전이라고 해도 좋겠다. 골목 끝에서 강변북로 위를 가로지르는 보행교에 다다랐을 때,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일정한 간격으로 흘렀다. 일요일 저녁 8시 7분, 길 위의 시간은 평일보다 한 박자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녁 8시 23분, 옥수역 1번 출구 앞 짧은 메모
옥수역 1번 출구 옆 편의점 앞 벤치에 잠깐 앉아 휴대폰 메모장에 오늘의 산책을 한 줄씩 옮겨 적었다. 응봉산까지 왕복 약 4.2km, 누적 시간 67분, 가장 추웠던 순간은 팔각정 난간 옆 섭씨 19도쯤. 평소 같으면 잘 안 오는 동쪽 코스를 일부러 골랐던 이유는, 다음 주에 쓸 트렌드리포트 글의 배경 사진을 찾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 사진은 한 장도 못 찍었다. 그 대신 영산홍 떨어진 자리와 노부부의 같은 운동화 두 켤레가 머리에 남았다. 일요일 저녁의 산책은 이런 식으로 의도와 결과가 어긋날 때 가장 잘 적힌다.
결론 메모
응봉산 팔각정에서 보낸 26분이 오늘 일요일의 가장 조용한 26분이었다. 한낮의 24도와 저녁의 19도 사이를 후드 집업 한 장으로 견뎠고, 강 너머의 풍경 하나와 골목의 오래된 빌라 두 채를 머릿속에 한 줄씩 적어 두었다. 다음 일요일 저녁에는 응봉동 반대편, 금호산 쪽으로 한 번 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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