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4시 10분, 충신동 낙산성곽길에서 본 1970년대 시멘트 기와 단독주택 다섯 채
나는 토요일 오후 4시 10분에 동대문역 4번 출구에서 출발해 낙산성곽길 동쪽 사면으로 들어갔다. 충신동 골목 안쪽에는 1970년대 시멘트 기와를 그대로 얹은 단독주택이 띄엄띄엄 남아 있다. 처마 끝이 닳은 모양과 외벽 인조석의 균열, 옆집과의 간격까지 다섯 채를 한 채씩 멈춰 서서 적어두었다.
첫 번째 집 — 충신동 1-21 근처, 처마 깊이 약 60cm
4번 출구에서 종로44길을 따라 4분쯤 오르면 골목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으로 들어가 두 번째 집이 첫 기록이다. 박공 지붕에 시멘트 기와가 가지런히 깔려 있고, 처마 깊이는 눈대중으로 약 60cm. 시멘트 기와는 표면이 회색으로 떨어져 있고, 가장자리 한 줄에는 이끼가 길게 들러붙어 있었다. 출입문은 갈색 알루미늄 새시. 문 옆에는 1980년대식 우유 투입구가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위에 검은 매직으로 '우유 안 받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 글씨를 사진으로 찍지 않고 노트에만 옮겨 적었다.
두 번째 집 — 종로44가길 안쪽, 시멘트 기와와 옥상 평슬래브의 어색한 동거
같은 골목에서 30m쯤 더 올라가면 이상한 집이 한 채 있다. 1층은 분명 1970년대 단독주택의 외형인데, 2층은 1990년대쯤 평슬래브로 다시 올린 모양새다. 1층 처마는 시멘트 기와, 그 위 2층은 콘크리트 슬래브. 두 시대가 한 건물에 한 층씩 얹혀 있었다. 외벽은 1층이 인조석 뿜칠, 2층이 베이지색 페인트. 색이 맞지 않아서 멀리서 보면 두 집을 억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인다. 1980~90년대에 자식 세대가 결혼하며 위층을 올린 집들이 충신동에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들었다.
세 번째 집 — 옆집과의 간격 약 70cm, 빨랫줄과 시멘트 기와의 거리
골목이 한 번 더 꺾이는 곳에서 만난 집은 옆집과의 간격이 약 70cm밖에 되지 않았다. 두 집의 시멘트 기와가 거의 맞닿아 있고, 그 사이 좁은 틈에 흰색 빨랫줄이 가로로 걸려 있었다. 줄 위에는 검은색 양말 두 켤레와 흰 셔츠 한 장이 햇볕에 말라 가는 중이었다. 오후 4시 30분의 햇빛이 시멘트 기와의 측면에 비스듬히 떨어지면서, 빛이 닿은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색이 거의 두 단계 차이가 났다. 회색에서 짙은 회색으로. 나는 이 두 단계의 그라데이션이 좋아서 한참 멈춰 있었다.
네 번째 집 — 외벽 인조석의 균열과 보수 흔적
네 번째 집은 외벽이 인조석 뿜칠인데, 정면에서 봤을 때 1층 창문 아래로 길이 약 1.2m의 사선 균열이 가 있었다. 균열 위로는 회색 시멘트로 메운 자국이 두 줄 있고, 그중 한 줄은 비교적 최근에 보수한 듯 색이 더 밝다. 사람들이 이 집에 여전히 살고 있다는 신호다. 현관에는 검정색 운동화 한 켤레와 흰색 슬리퍼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사람이 사는 집을 적을 때는 더 짧게 쓰려고 한다. 외형 몇 줄과 햇빛이 닿은 위치 정도까지만 옮기는 것이 예의에 가깝다고 느낀다.
다섯 번째 집 — 옥상 슬래브 위 장독대, 그리고 사라지는 풍경
마지막 다섯 번째 집은 골목의 끝, 낙산성곽 아래 어귀에 있었다. 본채는 1970년대 시멘트 기와인데, 본채 뒤편에 옥상 평슬래브가 따로 한 칸 더 붙어 있다. 그 옥상 위에 장독 일곱 개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가장 큰 독은 어른 무릎 높이쯤, 가장 작은 것은 종아리 절반 정도. 옥상 가장자리에는 녹슨 빨래 건조대가 한 대 비스듬히 서 있고, 그 옆에 작은 화분 세 개. 깻잎으로 보였다. 나는 옥상 장독대 풍경이 서울 동쪽 단독주택지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충신동 일대에도 재개발 논의가 길게 이어져 있고, 이 다섯 채 중 몇 채가 다음 해에도 같은 자리에 있을지는 모른다.
마무리 메모
오후 4시 10분에 시작해 약 50분 동안 다섯 채를 보았다. 충신동 낙산성곽길의 단독주택은 한 채씩 다른 시대를 짊어지고 있었고, 그래서 한 채씩 멈춰 서야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적어 두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작업이라고, 오늘도 다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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