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첫 수요일 오후 1시 40분,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앞에서 — 김수근의 붉은 벽돌과 1979년 모더니즘

5월 첫 수요일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옆 아르코미술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1979년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 외벽은 마로니에 잎이 짙어진 5월의 햇볕 아래에서 더 단단하고 더 따뜻하게 보였다. 사라지지 않은 것을 한 번 더 적어 둔다.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까지 200m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200m 정도 걷는다. 시간은 오후 1시 40분쯤이었고, 평일 낮의 대학로는 한산한 편이었다. 마로니에공원에 들어서면 정면 왼쪽이 아르코예술극장, 오른쪽 안쪽으로 한 발 더 들어가면 아르코미술관이다. 두 건물은 모두 김수근의 손에서 나왔다. 미술관은 1979년, 극장은 1981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47년 전 외벽 그대로의 붉은 벽돌이 5월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벽돌의 질감과 줄눈 — 멀리서 본 외벽

정면은 폭 약 30m, 높이는 4층 약 16m로 가늠되었다. 외벽의 붉은 벽돌은 흔히 보는 매끈한 적벽돌이 아니라 표면에 거친 결을 그대로 남긴 종류였다. 줄눈은 흰색에 가까운 회색 계열로 깊게 파인 듯 보였고, 8m쯤 떨어져서 보면 벽 전체가 작은 알갱이가 빼곡히 박힌 도자기 표면처럼 보였다. 가까이 1m로 다가가 만져보니 손끝이 쓸리는 까칠한 감촉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모더니즘 건축이 산업적인 매끈함보다 손맛 같은 거친 결을 택했다는 흔적이라고, 나는 짧게 적어두었다.

창과 입면의 비례 — 김수근식 리듬

외벽에는 사각의 작은 창들이 일정한 간격이 아니라 약간 어긋나는 리듬으로 박혀 있다. 한 면에 12개쯤 되어 보였다. 창 사이의 벽면이 두꺼운 곳은 약 1.5m, 좁은 곳은 60cm 정도. 이런 비대칭이 김수근식 입면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 출입구는 의외로 검소했다. 한 단 낮춰 들어가는 입구는 폭 2m가 채 안 되어 보였고, 그 위로는 작은 캐노피만 짧게 나와 있었다. 큰 건물이 정문을 작게 두는 일은, 도시의 위계를 낮추는 한 방법이라고 누군가 적어둔 적이 있다.

마당과 도시 — 1979년의 결정들

아르코미술관은 마로니에공원이라는 큰 마당을 정문 앞에 둔다. 마당은 미술관의 것이 아니라 도시의 것이었다. 5월의 마로니에 잎은 손바닥 다섯 개를 펼쳐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짙게 자라 있었고, 그 그늘 아래로 학생들이 책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다. 1979년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설 때, 김수근은 마당과 건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두는 쪽을 골랐다고 들었다. 47년 뒤 5월의 평일 오후, 그 결정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르코예술극장 외벽 — 1981년의 한 단 더 거친 결

마당을 가운데 두고 미술관 맞은편에 아르코예술극장이 마주 보고 서 있다. 같은 붉은 벽돌이지만 결이 한 단 더 거칠었다. 미술관보다 2년 늦게 지어진 만큼 김수근의 손이 더 자유로워진 시기로 짐작되었다. 극장 외벽에는 미술관과 비슷한 작은 창이 같은 리듬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매스 자체가 더 단단한 덩어리감으로 다가왔다. 두 건물이 마주 보며 마당 하나를 함께 만든다는 사실이, 5월의 햇볕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오후 2시 30분, 산책 메모

마로니에공원 벤치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대학로 일대는 1980년대 이후 소극장이 모이면서 지금의 풍경이 자리잡았다고 한다. 그 풍경의 골격에 1979년과 1981년의 두 붉은 벽돌 건물이 얹혀 있다. 젠트리피케이션과 임대료 문제로 대학로의 소극장이 줄어든다는 소식을 종종 듣지만, 적어도 마로니에공원과 그 둘레의 건축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라진 것보다 사라지지 않은 것을 먼저 적어 두는 산책이 5월에는 그래도 더 자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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