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둘째 수요일 점심 12시 28분, 광화문광장 — 점심시간 30대 남자 봄옷 12벌
점심을 먹고 광화문광장을 가로질러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걸었다. 5월 둘째 수요일, 낮 기온은 약 22도쯤이었고 바람은 북서쪽에서 약하게 불었다. 횡단보도 한 번 신호를 받는 동안 내 옆을 스쳐 지나간 30대로 보이는 남자 열두 명의 옷차림을 머릿속에서 한 벌씩 묶어 보았다.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 12시 28분의 햇빛
광장 남측 횡단보도에서 세종대로 사거리 쪽으로 신호를 기다렸다. 가로수 그늘과 햇빛이 보도 위에 약 1.5m 간격으로 줄무늬를 그어 놓았고, 사람들은 그 줄무늬를 가로질러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양복 재킷을 한쪽 팔에 걸친 사람, 베이지 면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사람, 챔브레이 셔츠 위에 얇은 카디건을 걸친 사람이 차례로 지나갔다. 5월 중순의 광화문은 더 이상 봄 초입의 어색한 두께가 아니라 셔츠 한 장이 주역으로 올라오는 시기였다.
열두 벌의 구체 목록
1) 검정 슬랙스에 흰 옥스퍼드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어 손목 위 약 4cm. 2) 베이지 면바지에 옅은 하늘색 셔츠, 가죽 더비. 3) 짙은 청바지에 회색 폴로 반팔, 회사 출입증 목걸이. 4) 짙은 회색 슬랙스에 흰 티셔츠 위 네이비 가벼운 블레이저. 5) 카키 치노에 군청 셔츠, 흰 스니커즈. 6) 흑청 데님에 짙은 그레이 카디건, 안쪽은 흰 라운드. 7) 짙은 회색 정장 위아래, 노타이, 셔츠는 옅은 핑크. 8) 베이지 치노에 흰 셔츠, 손에 든 종이가방 하나. 9) 검정 슬랙스에 차콜 니트 반팔, 검정 가죽 스니커즈. 10) 진청 데님에 흰 셔츠를 통 크게 입고 하단은 안 넣은 채. 11) 옅은 베이지 정장에 흰 셔츠, 갈색 더비. 12) 검정 슬랙스에 검정 폴로 반팔,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다섯 가지 공통 패턴
첫째, 재킷의 비중이 빠르게 줄었다. 열두 명 중 재킷을 입은 사람은 네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손에 들고 있었다. 둘째, 셔츠의 색은 흰색과 옅은 톤이 압도적이었다. 셋째, 하의는 검정/짙은 회색 슬랙스, 베이지 치노, 짙은 청바지 세 갈래로 거의 균등하게 나뉘었다. 넷째, 신발은 가죽 더비와 흰 스니커즈가 약 4:6 비율로 보였다. 다섯째, 양말은 짙은 색 또는 노출 없는 발목 양말이 다수였고, 발목을 일부러 드러낸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한 벌만 들고 들어간다면
오늘 광화문 사거리에서 가장 안전하면서 동시에 가장 무난하지 않은 조합은 7번이었다. 짙은 회색 정장에 노타이, 옅은 핑크 셔츠. 정장이라는 형식은 광화문이라는 장소에 맞고, 핑크는 5월 점심의 햇빛을 한 단계 받아 주는 색이다. 무난하지 않은 조합으로는 10번이 눈에 띄었다. 흰 셔츠를 통 크게 풀어 입고 진청 데님을 받친 차림은 사무실 점심 풍경에 한 줄 어긋난 느낌을 주면서도 깔끔했다. 한 벌만 들고 들어간다면 7번을 택하고, 한 벌만 시도해 본다면 10번 쪽으로 기울 것이다.
오늘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디테일
4번 사람의 네이비 블레이저는 어깨선이 거의 무너져 있었다. 안감을 최소화한 비정형 재단으로 보였고, 그 위에 흰 티셔츠 한 장을 받쳐 입어서 정장과 캐주얼의 경계가 흐려져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이런 어깨선의 재킷이 늘어난다는 건, 사무실 옷차림이 또 한 칸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5년 전의 광화문 점심은 어깨가 또렷한 정장이 더 많았다.
광장의 바닥과 옷차림이 만나는 지점
광화문광장 바닥은 5월 햇빛을 머금어서 옅은 회색이 따뜻한 회색으로 보였다. 그 바닥 위에서 검정 슬랙스는 묵직하게 가라앉았고, 베이지 치노는 한 톤 떠 보였다. 흰 스니커즈를 신은 사람들은 발 끝에 짧은 그림자를 끌고 다녔고, 가죽 더비를 신은 사람들은 굽 뒤쪽에서 또각 소리를 약하게 남겼다. 광장이라는 큰 면적의 회색 위에서는 옷차림의 색이 한 톤 더 또렷해진다. 그래서 같은 옅은 핑크 셔츠라도 사무실 안에서 입을 때보다 광장 위에서 입을 때 색이 살아 있었다. 적어도 광화문광장은 옅은 색 셔츠 한 장이 가장 유리한 무대였다.
결론 메모
5월 둘째 수요일 광화문광장 점심의 30대 남자 옷차림은, 셔츠가 주역으로 올라오고 재킷은 손에 걸쳐지는 단계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흰색과 옅은 톤의 셔츠, 슬랙스/치노/진의 세 갈래 하의, 그리고 비정형 어깨선의 재킷이 오늘의 키워드였다. 다음 주 같은 시각의 같은 횡단보도에서 한 번 더 세어 보면, 재킷의 비율이 더 떨어지고 반팔 셔츠의 등장이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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