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첫 수요일 점심 12시 41분, 종각역 4번 출구에서 관철동 골목 입구까지 — 30대 직장인 남자 봄 옷차림 열한 벌
5월 첫 수요일 점심, 종각역 4번 출구에서 관철동 골목 입구까지 약 220m를 걸으며 30대 전후 직장인 남자들의 옷차림 열한 벌을 적었다. 기온은 섭씨 17도쯤, 흐린 하늘에 5월치고는 서늘했다. 셔츠 위에 무엇을 걸쳤는지, 카라의 풀림과 다림질의 흔적, 가방의 톤, 신발의 형태까지 본 만큼만 적는다.
종각역 4번 출구의 첫 다섯 사람 — 회색 블레이저의 변주
오후 12시 41분, 종각역 4번 출구를 빠져나오자 흐린 회색 하늘이 먼저 보였다. 기상청 앱은 17도라고 적었지만 체감은 한두 도쯤 낮았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사람은 짙은 회색 블레이저에 흰 셔츠를 받쳐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어깨선은 살짝 떨어지는 컷, 셔츠 단추는 위에서 두 개를 푼 채였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사람도 회색 계열의 블레이저였는데, 한 사람은 명도가 더 어두운 차콜, 또 한 사람은 캐멀이 섞인 베이지 그레이였다. 같은 회색이라도 채도가 다르면 인상이 꽤 갈렸다. 다섯 번째 사람은 면 100%로 보이는 라이트 그레이 셔츠 한 장에 베이지 슬랙스.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의 평균값을 다섯 명에서 미리 본 셈이다.
보신각 앞 횡단보도, 셔츠 단추를 두 개 푼 사람 셋
보신각 방향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 있을 때, 셔츠의 위쪽 단추를 두 개 푼 사람이 동시에 셋이 보였다. 한 사람은 옅은 하늘색 옥스퍼드 셔츠, 또 한 사람은 흰 바탕에 잔잔한 줄무늬, 마지막 사람은 살짝 노란 기가 도는 아이보리였다. 다림질이 잘 들어간 셔츠는 단추를 풀어도 카라가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그렇지 않은 셔츠는 양쪽 카라가 어색하게 벌어졌다. 5월 첫 수요일 흐린 점심의 종로에서, 셔츠 한 장으로도 그 사람이 오늘 오전에 어떤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점심 회식에서 막 나온 듯한 사람과, 회의실에서 곧장 빠져나온 듯한 사람의 셔츠는 같은 흰색이라도 결이 달랐다.
카라의 풀림과 다림질의 흔적
카라의 풀림은 가까이 가야 보인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두어 걸음 옆에 선 남자의 셔츠 카라 끝이 살짝 들떠 있었다. 다림질을 안 한 게 아니라 이미 한참 입어 끝이 닳은 모양이었다. 그 옆에 선 사람은 정반대로 카라가 빳빳했는데, 풀 먹인 흔적이 있어 마치 새 셔츠 같았다. 이런 작은 차이는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다. 직접 옆에 서 있어야만, 그것도 신호가 길어야만 보인다. 5월의 종로1가 횡단보도가 그래서 좋은 관찰 지점이 된다. 신호 한 번에 약 38초쯤. 그 사이에 옆 사람의 셔츠가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가 보였다.
가방의 톤이 옷보다 먼저 말한다
옷보다 가방이 먼저 말한다는 인상은 오늘도 여전했다. 비즈니스 토트 백을 메고 있던 사람의 가방은 옅은 카멜에 가죽 손잡이가 검정으로 콤비네이션 되어 있었다. 옷은 회색·베이지로 무난한데 가방은 따뜻한 톤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옅은 옷에 새카만 가죽 메신저 백을 들었는데, 그 대비가 강한 만큼 키가 더 커 보였다. 종로 직장인의 봄 가방은 결국 두 갈래로 갈렸다 — 옅은 톤의 통일, 혹은 한 점의 검정 대비. 백팩보다는 토트와 메신저가 더 많았다는 점이 광화문이나 시청과는 또 다른 결이었다.
신발 — 가죽인 척 한 폼의 회색 스니커즈
신발은 의외로 비슷했다. 열한 명 중 일곱 명이 회색 계열의 가죽인 척한 폼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발등 부분에 가죽 질감을 살린 것, 단순한 마이크로파이버, 그리고 옅은 베이지 캔버스. 한 사람만이 정통 옥스퍼드 가죽 구두였는데, 굽이 약 2.8cm쯤 되는 클래식 스타일이었다. 종로1가 일대는 정장 구두가 어울리는 동네였는데, 5월의 흐린 평일 점심에는 가벼운 스니커즈가 더 많았다. 셔츠는 그대로 입되, 신발에서 한 박자 풀어주는 것 — 봄 직장인 남자의 평균 해법이었다. 흙이 묻은 신발은 한 켤레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점심 먹으러 나오기 전 한 번 닦아 신은 모양이었다.
결론 메모 — 5월 첫 수요일 흐린 점심의 평균값
흐린 5월 첫 수요일 점심 종로1가에서 본 직장인 남자 옷차림 열한 벌의 평균값은 회색 블레이저 혹은 셔츠 한 장, 베이지 톤 슬랙스, 회색 폼 스니커즈, 그리고 한 점의 검정 가방이었다. 비가 올지 모르는 날씨인데도 우산을 든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점심 직후의 종로는 셔츠 단추가 가장 많이 풀리는 시간대 같았다. 다음 흐린 봄날 같은 시간에 다시 종각역 4번 출구에 서서, 그 평균값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한 번 더 적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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