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첫 수요일 오후 3시, 서계동 1구역 — 만리재고개 그늘과 1981 우편함 일곱
서계동 1구역은 서울역 서편 언덕에 남은 옛 단독·다세대 골목이다. 5월 첫 수요일 오후 3시, 만리재고개의 그늘 아래에서 셔터 아홉, 1981년식 우편함 일곱, 옛 상호 다섯을 손에 꼽아 두었다. 이 동네가 사라지기 전에 이름을 적어 두는 일이 내 몫이라 생각했다.
서부역 4번 출구에서 만리재로 올라가는 짧은 오르막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서부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칠패로의 너른 차로가 등 뒤로 밀려나면서 곧장 작은 사거리가 나타난다. 거기서 만리재로 들어서면 길이 한 번 휘어지면서 가파른 경사가 시작된다. 5월 첫 수요일 오후 3시, 햇살은 고개 위쪽 능선만 비추고 골목 안쪽은 이미 회색에 가까운 그늘이었다. 나는 만리재로 큰길을 두고, 좌측의 좁은 골목 — 서계동 1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 을 골랐다. 입구의 콘크리트 전봇대에는 '서계동 1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이라 쓰인 안내판이 얇은 비닐테이프로 붙어 있었고, 그 아래 손글씨로 '재개발 반대'라 크게 적힌 다른 종이가 절반쯤 떨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두 종이가 같은 못에 걸려 있는 풍경부터 이 동네의 시간이 둘로 갈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셔터 아홉, 페인트 아래 옛 상호 다섯
골목을 60m쯤 들어가면 가게로 쓰던 단층 점포가 한쪽 면을 따라 줄지어 있다. 셔터를 내린 점포 아홉을 셌다. 그중 다섯 곳은 셔터 위 간판 자리에 새 페인트가 덧칠되어 있었지만, 회색 유성 페인트 아래로 옛 상호가 흐릿하게 비쳤다. 한 곳은 '○○철물', 한 곳은 '서계세탁', 한 곳은 '만리재상회', 한 곳은 '○○미용실', 그리고 모서리 가게는 '신성식당'으로 읽혔다. 페인트칠한 사람이 굳이 두꺼운 흰색을 쓰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셔터 발판 사이에는 1990년대식 세탁소 영수증 종이 한 장이 끼여 있었다. 잉크는 다 날아가서 가격은 보이지 않았다.
1981년식 빨간 우편함 일곱과 'OO연립' 명패
골목 안쪽 다세대 주택의 입구마다 빨간 우편함이 매달려 있다. 같은 형태가 일곱 개. 둘은 거의 새것에 가깝게 도색되어 있고, 다섯은 옛 페인트가 그대로다. 옛 모양의 우편함 옆에는 작은 알루미늄 명패가 붙어 있는데, '서계연립 1981.06', '대성연립 1981.09', '신우빌라 1982.04' 같은 식이다. 1981년이라는 숫자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등장했다. 같은 시기 같은 형태로 한 번에 올라간 다세대였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한 명패 옆엔 손글씨로 관리인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굳이 옮겨 적지 않는다.
만리재 그늘, 슬레이트 지붕과 옥상 화분 열셋
골목을 더 안쪽으로 100m 들어가면 단독주택 구역이 나온다. 슬레이트 지붕이 일부 남아 있고, 일부 집은 슬레이트 위에 다시 합판과 방수페인트를 덮어 두었다. 햇볕이 짧게 닿는 옥상에는 화분이 일렬로 놓여 있다. 한 옥상에 셋, 그다음 옥상에 둘, 또 그다음 옥상에 다섯. 도합 열셋. 식물의 종류는 다 다르지만 화분만큼은 같은 검은색 플라스틱이다. 같은 길에서 같이 사 와서 나눠 쓴 것 같다. 저녁 다섯 시쯤 골목 끝의 작은 평상에 모여 화초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의 풍경이 그려졌다.
도시정비형 재개발의 경계선과 남은 시간
서계동 1구역은 도시정비형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사업시행계획 인가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서 본 안내판과 손글씨 종이가 이 동네의 현재를 가장 정직하게 말해 준다. 재개발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셔터의 옛 상호도, 1981년식 우편함도, 슬레이트 지붕 위 화분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옛 상호 다섯, 우편함 일곱, 화분 열셋, 그리고 평상 두 개. 이 숫자들은 정확하게 적어 두지 않으면 다음 주에 와도 다시 셀 수 없을지 모른다. 골목을 한 바퀴 더 돌아 만리재로로 나오는 사이에, 서울역 쪽 KTX 경적이 멀리서 두 번 울렸다.
마무리 메모
나는 이 동네를 잘 모른다. 서계동에서 자란 것도, 만리재에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다. 다만 5월 첫 수요일 오후 3시에 잠깐 다녀간 사람으로서, 본 것을 본 만큼만 적어 둔다. 사라지는 것의 마지막 모습을 잘 찍는 일은 어렵다. 잘 적는 일은 그보다 조금 쉽다. 이 글이 5년 뒤 누군가가 '서계동 1구역에 1981년식 빨간 우편함 일곱이 있었구나' 하고 검색해 닿는 곳이 되면 좋겠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다시 와서, 같은 우편함 일곱이 그대로 있는지 세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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